가끔 과잉된 감정의 언어를 동원하지 않고선 좀체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사기 마련이다. 너는 참 입에 걸레를 물었구나. 이 와중에 그런 언어 없이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불가피한 현실은 종종 무시된다. 하지만 화자의 예의 없음과 청자의 자기 속 편하기 위한 결벽증은 상황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그 결벽증이 땅 위의 빤한 현실을 가리고 자위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양익준 감독이 부산에 들고 온 첫 번째 장편영화 <똥파리>의 첫인상 또한 비슷한 생각을 환기시킨다. <똥파리>는 소위 꽤나 ‘센’ 영화다. 주인공은 욕 없이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끝내지 못하는 건달이다. 모든 상황은 극단적으로 불우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하나 같이 서로를 미워한다. 오빠는 동생을 때리고 아버지는 딸을 때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때린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순환된다.
나는 <똥파리>의 강한 외양에 무분별한 혐오를 느껴 이 영화의 아름다운 면모를 채 알아채지 못할 사람들이 아쉽고 안타깝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현실이라고 해서 그 현실을 무시할 권리 따윈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딸이 칼부림을 주고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가정이야 말로 가장 잔인한 형태의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폭력이 발생하는 공간이라는 근본적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네 가정은 그렇지 않다고요? 그것 참 잘 됐습니다. 거기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영화거든요.
<똥파리>는 극적 재미와 긴장을 위해 기계적인 화해를 조장하지 않는다. 피폐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가학을 나열할 생각도, 반대로 단순화시켜 판타지로 얼버무릴 생각도 없다. 현실 이상이나 이하로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감독의 자전적인 기억들로부터 출발하는 그런 식의 솔직함이야 말로 <똥파리>의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다.
양익준 감독이 직접 연기하는 주인공 상훈은 사채업자 친구 밑에서 수금 일을 하는 건달이다. 상훈은 대단히 폭력적인 남자다. 함께 수금을 하는 직원들조차 숱하게 얻어맞아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상훈의 오늘은 과거 아버지의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아버지의 폭력은 여동생을,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상훈은 징역을 살고 나온 아버지를 종종 찾아간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상훈의 밤이 아버지를 향한 폭력으로 가득하다면, 나머지 반나절은 배다른 누나의 아들을 향한 남모를 애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 아이에게 만큼은 잘 해주고 싶다. 이 아이만큼은 잘 자랐으면 좋겠다. 물론 이마저도 거칠고 난폭하기 그지없어 마음이 전달될 리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찾아간다.
그런 상훈의 앞에 거친 고등학생 연희(김꽃비)가 나타난다. 우연한 계기로 가까워지면서 상훈은 연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연희는 상훈과 상훈의 주변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그 자신마저 상훈 못지않게 끔찍한 가정환경 안에 있다는 걸 밝히려 하지 않는다. 연희의 오빠 영재는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상훈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물론 그는 연희와 상훈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이후의 상황은 나쁘게도, 좋게도 나아가면서 종잡을 수 없는 기복을 탄다. 그러다 갑자기, 영화 속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큰 얼개만 두고 보면 새로운 이야기라 평가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현실이 온전히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기인한다는 설정은 이제 좀 지겹다. 주인공의 폭력을 조금은 연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불편해할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유사 가부장 히어로물과 달리, <똥파리>는 주인공 상훈을 미화할 의지가 없다. 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상훈의 현실이 아니다. 그 안에서 보여지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또한 변화의 의지다.
이런 성격은 <똥파리>와 관객 사이의 대단히 절묘한 거리감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똥파리>는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다. 과도한 영화적 설정이나 장치들을 통해 작품과 관객을 별개로 괴리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도무지 호응하기 어려운 폭력적 인물 상훈을 보여주면서 영화 속 상황에 필요 이상으로 동참하고 공감하는 것 또한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동의하기도 관조하기도 어려운 바로 그 위치에서, 관객들은 객관화된 자기 주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화학작용에는 “이 나라 아버지들은 아주 좃같아, 밖에선 빌빌대면서 집에만 오면 김일성처럼 굴려 들어”같은 대사들도 한 몫을 한다. 어떤 면에서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와도 유사한데, <피와 뼈>가 끝내 후회하지 않는 무쇠 가부장의 파격을 내세워 나름의 울림을 얻는 반면 <똥파리>는 좀 더 관객의 현실과 소통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똥파리>는 ‘집 안의 코끼리’ 이야기를 연상케 만든다. 집 안에 작은 코끼리가 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게 별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코끼리는 점 점 더 자란다. 그리고 급기야 집에 꼭 끼일 정도로 몸집이 커져버린다. 이때가 되면 코끼리는 문제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그러나 코끼리가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이걸 해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 자체를 부수어 버리지 않는 이상 코끼리를 빼낼 방법이 없을 것 같잖아. 그냥 같이 사는 게 속 편해요. 못 본 척 지나간다. 모른 척 딴청을 피운다. 코끼리에 대해 말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된다. 어차피 다 알고 있거든? 혼자 똑똑한 척 하지 마. 그렇게, 코끼리는 집의 일부가 되고야 만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 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마나 잠깐 후회하고 금세 망각하고 다시 되풀이된다. 나와 나의 행동을 분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열함이다. 수십 년을 함께한 가족 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 부모와 형제자매를 개별적인 인격체로 객관화시킬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똥파리>는 바로 그 코끼리를 집 밖으로 끄집어내 그간 부정해왔던 당신의 현실이라며 펼쳐 놓는다. 더불어 그런 끔찍한 반복에 종지부를 찍자고 이야기한다. 어렵겠지만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고 권한다. 우리 모두,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 위대해서가 아니다. 가족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지켜내야 할 유일의 가치라서가 아니다. 단어에 동반되는 끈끈함이나 따뜻함 따윈 중요치 않다. 사람이 괴물 되는 건 순식간이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선 스스로 괴물이 되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똥파리>는 그런 노력을 부추긴다. 올해 부산 영화제에서, 나는 이 영화를 발견했다. 허지웅 (<프리미어> '허지웅의 키노키')
일러스트_ 장재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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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단백질>에서 재호역으로 열연해주었던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완성되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부산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는데 관객반응이 아주 좋다고 하네요.
똥파리 대박을 기원하며..익준이형 화이팅. 꽃비도 화이팅 ㅎㅎ
밑은 <사랑은 단백질>에서 열연하고 있는 양익준 감독.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