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이어졌다. 시간은 새벽을 훌쩍 넘어섰다.
얘기가 잘 먹힌다.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보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를 밤이 깊었고 술에 취했단 이유로 끝내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그럴 것이다
여기 저기 늦게 까지 하는 술집을 찾다가 결국엔 편의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부터 맘에 두고 있던 근사한 아가씨는 먼저 집에 간다며 이동하는 사이에 집으로 가버렸다. <빌어먹을!> 다음번에 만남을 가질 때는 좀 더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 겠다.
술자리가 이어지다가 아까부터 맘에 들지 않던 남자아이 하나가 술에 취해 시비조로 말을 건다.
<칸타타를 아세요?> <응?>
칸타타가 뭐지? 문학가? 철학자? 누군지 몰라도 당연히 알아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설마 커피 칸타타를 말할리는 없을테니까. 이럴땐 어떻게 하지?
<누구? 모르는데? 뭐하는 사람인데?>
<앤의 남자친구인데...>
앤? 앤은 누구지? 빨간머리 앤이 아닐것이지만 <앤 셜리?> 라고 입에서 튀어 나올 뻔했다. 빌어먹을 상황.
아까부터 맘에 들지 않던 그 남자아이는 내가 사실은 지식도 없고 잘난척이나 하는 인간인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건가?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건가? 그냥 안다고 하고 대충 넘어갈까? 내 자신의 캐릭터를 너무 무게 잡고 설정했나?
<앤도 모르겠는데? 누구지? >
<앤을 모른단 말이에요? 칸타타도요? 칸타타의 음악을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어요? 압구정동을 기반으로 잡고 있는 최고의 인디 뮤지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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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쌍!
안도의 한숨. 이런 얼빠진 놈...난 뭐라도 되는 사람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더니..빌어먹을..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한순간에 태도가 당당해진다. 가볍게 무시해도 될것같다.
<압구정에도 인디 씬이 있는 줄 몰랐네..난 홍대 뮤지션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알어..>
<한번 만나보실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글쎄..난 별로 관심 없는데? 나 별로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고..요즘 대세야 포미닛이지 포미닛...크크크..>
그때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나에게 호의적이고 내 철학을 대부분 이해하고 있었던 듯한 태도를 보이던 나이 있던 남자가 말한다.
<칸타타를 모르시다니 의외네요.>
이 놈들 뭔소리를 하는 거야. 둘은 작당을 하곤 칸타타를 모르는 나에게 칸타타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됬지? 아까 맘에 두던 여자가 갈때 술자리를 끝냈어야 했다.
마지막에 맥주나 한잔 더 하면서 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무대로 끝났어야 하는 무대가 칸타타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 편의점 앞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춥다는 핑계로 이 술자리를 끝내야 하나?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손을 비비며 엄청 추운척 해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두 손을 뺐다가 내 양손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양손을 아주 조그마한 수포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안다. 전에도 그랬었다. 바로 얼마전이었다.그래 얼마전 아는 여자애가 쌀쌀한데도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마시자고 한 후도 이렇게 수포가 양 손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휠씩 범위가 늘어났다. 팔꿈치 까지 그 작은 수포가 꽉채워 두 팔을 뒤덮고 있었다. 흡사 나병 환자의 몸 같다. 당황하지 말자..전에도 그랬지만 조금 따뜻한데 들어가서 조금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없어지는 것들이다. 절대 손으로 억지러 터뜨리려 하면 안된다. 그러면 없어지고 나서도 터진 자리가 쓰라리다. 저번에도 그랬었다.
그런데 이 수포들은 언제부터 나기 시작한 거지? 내가 몸이 않좋나?
내가 수포에 시달리고 있던 말던 두명의 빌어먹을 놈들은 내가 칸타타를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뭐하시는 분이에요? >
뭐? 뭐라는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술을 마셨는데..오늘 술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 아니었나? 이 술자리의 처음이 생각 나지 않는다. 담배...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담배가 없다.
<담배 좀 사와야 겠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으로 들어섰더니 한 외국인이 있다.
디스 주세요. 아니 디스 플러스 말고...아니 저기 있는 저것..험..그러니까..그 옆에..그래..그거..
아니 무슨 편의점이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외국인을 알바로 쓰고 있어...
담배갑을 두드리고 비닐을 투덜대며 뜯다 갑자기 행동이 멈춘다. 어? 가만...
무언가 이상하다. 비현실적이다. 편의점을 나왔다.
아무도 없다.
여기는 어디지?
눈을 떴다.
꿈이다.
눈을 뜨자 마자 양손을 펼쳤다. 깨끗하다.
수포는 다 나았나?
아니다. 나는 손에 수포가 난적이 없다.
한번도 수포가 손에 생긴적이 없다.
예전에 그런적이 있었던거 같았는데...
아니다. 없다.
추운데에 오래 있으면 생기는 내가 가진 일반적인 증상인거 같았는데...
아니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아주 어렸던 시절 까지 뒤져봐도 그런적은 없다.
꿈에서 가졌던 술자리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모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예전부터 맘에 두고 있었던 근사한 아가씨 역시 나의 진짜 생에서 존재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와 비슷한 모델도 없다.
소름 끼친다. 그 꿈. 그 가짜 생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그 생처럼 가짜들이었다. 이럴 때 나는 내가 믿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꿈에서 깨어나듯 무언가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철썩같이 믿던 가치들도 내 손의 수포 같이 사라져 버릴것만 같다.
굳이 꿈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어릴때 믿던 가치가 나이들고 다시 생각해 보니 어이 없게 느껴진 적이 있지 않은가...아니다. 그런적이 실제로 있긴 있었던 걸까?
사람의 기억은 참 우스운 것이다. 기억이 그렇게 우습게 느껴질때 마다 그 기억을 생성하는 곳 근처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내가 믿는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믿는 가치가 다시 한번 불안해 진다.
컴퓨터를 켜고 혹시나 해서 칸타타를 검색해 본다.
원두커피 칸타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