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허지웅의 블러그
한국의 스필버그,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 이제는 한국의 닌텐도를 찾는다. 만약, 스필버그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닌텐도가 한국에서 시작했다면 그 모든 성공신화가 가능했을까. 이 같은 욕망이 한국 문화산업을 망쳐놓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꾸린지 한 달이 지났다. 지난 2월 4일에는 지하벙커를 벗어나 밖으로 나섰다. 과천 정부청사를 방문해 ‘현장 비상경제대책회의’를 가진 것이다. 장소는 지식경제부였다. 수출 침체로 확산되고 있는 경제불안심리를 막겠다는 목적이었다. 이 날 대통령의 한마디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온라인 게임은 우리가 잘하는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같이 개발된 크리에이티브한 제품은 소니, 닌텐도가 앞서가는 게 사실이다. 닌텐도 게임기를 우리 초등학생들이 많이 갖고 있는데 이런 것을 개발할 수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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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우리는 닌텐도 같은 것 개발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에 게임업계 종사자들과 네티즌들이 발끈했다. 칼럼리스트들의 펜대가 바빠졌고 인터넷에는 ‘명텐도 DS'라는 패러디물마저 등장했다. 비판의 요지는 게임 산업이 발달하려야 발달할 수 없는 척박한 한국의 현실은 간과한 채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대통령의 발언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사적 견해의 차원으로 돌리기에는 그 뿌리와 맥락이 너무 해묵고 깊다. 90년대부터였다. 1993년의 <쥬라기 공원>, 1994년의 <라이온 킹>이 결정적이었다. 그 때부터 문화 컨텐츠 하나에 자동차 몇 만대 수출이 맞먹는다는 수치의 환상이 파고처럼 찾아왔다. 당대 문민정부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서둘러 각종 문화 컨텐츠 지원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국의 디즈니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의 닌텐도를 찾는다. 십 수 년이 지났어도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공고해졌다. 지금 한국 문화계를 바라보며 혀를 차는 시장주의자들의 핵심 논점은 변함없이 ‘한국에는 왜 아무개가 없느냐’는 것이다. 저 수많은 문화계 지원정책의 핵심 키워드 또한, 여전히 ‘한국의 아무개를 육성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무개를 찾는 말들에는 당연한 오류가 있다. 그 아무개가 한국이라는 환경 아래서도 그 놀라운 시장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냐는 문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를 보자. 미야자키 하야오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은 <미래소년 코난>(1978)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 복장부터 논조까지 확연히 사회주의 세력을 연상시키는 하이햐바섬 농촌 공동체 사회와, 그 반대로 확연히 세계 자본주의 세력을 연상시키는 인더스트리아 사이의 대립을 그린다. 코난은 내부의 반체제 인사들과 협력해 인더스트리아를 무너뜨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쩌다 한국에서 태어나 빨갱이와 자본가의 대립을 그리는 이 애니메이션의 기획안을 어느 제작사에 내밀었다고 상상해보자. 70년대라는 점까지 감안해보면, 어디 끌려가 고문이라도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비슷한 설정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겠다”는 <붉은 돼지>도 마찬가지다. <이웃집 토토로>같은 건 ‘원 소스 멀티 유즈’ 트렌드에 맞지 않는 징그러운 캐릭터들뿐이니, 이걸로 어디 인형장사나 해먹겠냐는 비아냥과 함께 퇴짜 맞았을 게 빤하다.
한국의 닌텐도라는 말도 결국 마찬가지다. 새삼 닌텐도가 화제가 되는 건 세계경제불황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8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역대 최고 흑자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닌텐도는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고전을 거듭해왔다. 그야말로 암흑의 10년이었다. ‘패미컴’ ‘슈퍼패미컴’으로 대표되는 8비트, 16비트 게임기 시장에서 지켜왔던 점유율과 파괴력이, 32비트, 64비트 게임시장에선 도무지 먹혀들지 않았다. 급기야 세가-닌텐도 사이 양대 구도가 소니-마이크로소프트로 넘어가면서 닌텐도는 추억의 이름으로 전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뒤집은 건 닌텐도 DS였다. 하드웨어 성능보다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편의성, 아이디어로 승부한 것이다. 뒤이어 발매한 Wii 또한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 그렇게 닌텐도는 게임 업계의 황태자로 복귀할 수 있었다.
10년 전의 닌텐도와 지금의 닌텐도는 같은 회사다. 그러나 10년 전에는 “한국의 닌텐도”를 바라기보다 “한국의 세가 세턴(세가)”이나 “한국의 플레이 스테이션(소니)”를 더 욕망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욕망은 결과치에 따라서만 작동한다. 닌텐도가 작년에 올린 8조원의 영업이익, 스필버그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올린 천문학적 흥행기록 앞에서만 작동한다. 그것이 애초 그렇게 돈이 될 만한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창작자들은 단지 컨텐츠 자체의 완성도에 열과 성을 다했을 뿐이다. 이 당연한 노력의 과정이 한국에선 거꾸로 뒤집힌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인 컨텐츠의 성공배경을 벤치마킹해 그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이자고 이야기한다. 근사해보여도 깊은 논리가 없는 이야기다. 문화 컨텐츠를 성공과 시장의 개념으로 접근해선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문화산업은 결단코 순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돈을 버는 건 좋은데, 돈을 벌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이 결과치에 온전히 매달리는 프레임이 지원제도에까지 뿌리내려 있다. 애초 그런 욕망으로 만들어진 지원제도라서 그렇지만 최근 들어 더욱 그렇다. 이들에게는 한국의 아무개, 한국의 무엇을 감별해내 지원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최근 ‘해외에서 수상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한다’는 국가 주체 지원제도의 심사에 참여한 B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외에서 수상할 것 같은 작품을 선정하겠다는 기준 자체가 얼마나 천박한가. 심사위원들이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아무도 모른다. 그걸 내가 알면 그냥 내가 지원받고 말지 왜 다른 사람 것을 심사하겠나.”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작품 자체 완성도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됐다. 가짜 전문가들이 판을 친다. 한국의 아무개를 찾는, 세계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컨텐츠의 기준이란 문자로 정리돼 통계적으로 정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원제도의 선발 기준이나 선정 이유 또한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결과적으로 입을 맞추어 선정대상을 미리 점찍어두는 부적절한 사례 또한 급증하고 있다. 많은 수의 문화산업 사업자들이 아예 지원제도 같은 게 없이 모두 컨텐츠 본연의 시장가치만 가지고 경쟁할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역설한다.
한국의 닌텐도라는 이름의 욕망이 더욱 설득력 없는 건 그 사회 문화적 특수성 때문이다. 6, 70년대에는 어린이 날마다 시장의 만화책들을 전부 긁어모아 쌓아두고 불을 지르는 소위 ‘만화 화형식’을 행사처럼 치렀던 나라다. 오락문화를 바라보는 국민의식도 그렇지만 정책 면에서도 보수적인 입장의 마녀 사냥식 견제가 여전하다. 그토록 선망하는 스필버그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닌텐도의 나라 미국와 일본은 한국과 달리 관련된 국가 견제고 지원이랄 게 그리 없다. 거의 전무하다. 닌텐도가 성장한 건 국가가 밀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 나라는 창작물의 저작권에 대한 입장만 강경하게 설정해주었다. 각종 견제도, 지원도, 최소한의 차원에서 그쳤다. 나머지는 알아서들 한 것이다. 컨텐츠 자체의 완성도를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한국에선 모든 게 반대다. 컨텐츠 자체의 완성도를 짜낼 시간에 정책적 견제를 피할 방도를 고심하고 지원을 따낼 방안을 모색한다. 시장에서 핵폭탄급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먼저 고려한다.
한 네티즌은 ‘한국의 닌텐도’를 운운한 대통령의 말을 접하고 “닌텐도가 우리나라 회사였다면 (화투 제조회사였던 닌텐도는) 사행성 회사로 낙인찍혀 문을 닫거나, 아이들 공부를 방해하는 게임기를 만든다는 이유로 밤 12시 이후엔 공장도 못 돌렸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개제해 호응을 얻었다. 비약이라고 해도 문제의식은 남는다. 한국의 닌텐도를 쫒는 욕망은 허황된 것이다. 이 욕망이 한국 문화산업의 지지기반부터 시장성까지, 모든 것을 망치고 있다. 허지웅 (프리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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