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로토스코핑 촬영은 단 하루 만에 끝냈었기 때문에 <사랑은 단백질>이라면 등장인물이 더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길게 잡아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모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연감독은 호언 장담했다.
지금도 <지옥>을 보면 저걸 어떻게 완성했을까 스스로가 대견하게 생각되곤 해요. 많이 부족한
부분을 안고 시작했고 마무리했던 작품이거든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랑은 단백질>은 <지옥>의 경험치로
본다면 초반 작업 세팅하는 부분은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로토스코핑을
위한 촬영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스토리보드와 대사, 각 씬의 분위기를 검토했고 정리했다. 그리고 배우들의 대사 녹음 파일을
씬 별로 구분하여 다시 정리했고 연기의 방향성을 설정했다. 촬영을 하기로 한 4월 30일. 나는 카메라를 챙겨 들고 연감독
집으로 향했다. 연감독의 집은 수 많은 DVD와 화보집,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평소
애니메이션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애니메이션
쟁이 감독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물건들이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 촬영을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잠시 집
안을 정리해야 했다. 사실 촬영을 하기 위한 환경이나 시스템은 열악했지만 이곳에서 <지옥> 시리즈가 탄생했음을
생각한다면
애니메이션 제작에 필요한 건 쾌적한 환경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현명한 열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방
한 쪽에 놓여있던 컴퓨터에 배우들의 대사 웨이브(wave)파일을 카피해 놓고 한 씬 한 씬 재생해가며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열심히 연기를 하며 촬영에 임했다. 내가 카메라를 잡고 연감독이 모든 캐릭터를 연기했다. 원래 사람 동작의 작은 습관이나 패턴은
고유한 게 있어 한 사람이 모든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연감독이야 말로 <사랑은 단백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성격, 습관, 말투 등에 이미 정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저도 사실 수줍음도 많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배우들 대사 녹음할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캐릭터를 대신해 연기를 하고 있노라면 그런 제 성격은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네요. 하핫. 이번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호였습니다. 재호는 규정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많은 캐릭터들 중에서 재호가 비교적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부분도
있고 키(key)를 쥐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거든요. 돼지 사장이나 닭 사장 캐릭터는 배우들이 녹음할 때 감정선을 잘 잡아줬기
때문에 비교적 쉬었구요.
열!
혈!로 작업하는 연감독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때도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농 짙은 연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지옥>과는 사뭇 다른 쉽지 않은 캐릭터들의 표현 때문에 전체 내용의 1/3도 마치지 못하고 연감독은 잠시
'촬영중단'을 외쳤다. 결국 당일 촬영분 소스를 편집하고 원동화 테스트를 해 본 후 재촬영을 하기로 했다.
5월 1일 KOCCA(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현재 작업 중인 스튜디오)에서 촬영 소스를 IEEE1394와 Vegas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로 옮기고 다시
After Effect 프로그램을 이용해 시퀀스 파일로 출력을 했다. 촬영 이미지 파일을 프린트 출력한 후 트레이싱을 하던
연감독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방법으로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려운 부분이 참 많군요." 로토스코핑
방식은 익숙하긴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에 사용하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가령 캐릭터들이 책상에 앉아 있을 경우엔
책상의 높이, 각도가 맞아야 동화 트레이싱을 한 후 배경과 합성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소품과 캐릭터들의 화면 앵글에 맞춰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실제 소품을 준비해야 하고 캐릭터들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지옥>의 경우엔 그런 소품을 사용하지 않고도 동작을 추출할 수 있었지만 <사랑은 단백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던 대로 진행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익숙했던 제작방식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새벽에 잠도 오지 않더군요.
그러던 중에 '그래! 이거다!'라고 할 만한 아이디어가 머리에 반짝 스쳐가더군요.
5월 8일 약간 상기된 얼굴로 연감독은 내게 말했다. "피디님, 이번 작품 제작방식을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싶네요. 제작방식의 이름도 정해놨습니다. '더미 애니메이션(Dummy Animation)'" 연감독과 나, 그리고 연찬흠 기술감독은 한자리에 앉아 새로운 제작방식에 대해 의논했다.
당시 우리는 메인 프로덕션에 돌입하기 전에 기술감독에게
3D로 배경을 만드는 일과 캐릭터 중 닭 사장 정도를 3D 더미로 만들 것을 주문했었다. <사랑은 단백질> 이야기의
80% 정도는 재호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배경의 80%가 방 안 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 구조를 3D로
설정해 두면 손쉽게 카메라의 위치를 바꿀 수 있으니 레이아웃을 설정할 때 편리한 점이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또 사람 캐릭터는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애니메이션을 처리하기로 했지만 닭 사장의 경우 하체 등 사람이 연기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3D 더미를 만들어 놓기로 했었다. 연감독은 이 점에 착안을 했다
어차피 닭 사장 외 다른 캐릭터들도 모두 3D 더미를 만들려고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원화를 할 때 캐릭터의
턴어라운드 데이터가 있으면 작업이 편리하거든요. 그런데 3D 더미를 바로 애니메이팅을 해서 그 데이터로 원화로 그린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촬영할 때도 화면 앵글에 구애 받지 않고 아이-샷만으로 촬영한 후에 기술감독이 그 촬영소스를 보며 3D로 동작의
키(key)를 잡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죠. 그럼, 촬영이 쉬워지지 않겠어요?
더미 애니메이션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무조건 찬성할 수 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더미 애니메이션을
할 경우 기술감독에게 가중될 업무량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델링은 시간 내에 해낸다고 해도 애니메이팅까지 한다는 건 무리일
듯 싶었다. 연감독도 그 부분에 대해 공감을 하긴 했지만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일단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물론 기술감독의 작업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게다가 이미 촬영된 소스가 있었기 때문에 더미로 애니메이션을 하는 건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혼자서 무려 170 컷에 달하는 분량의 더미 애니메이션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완성해냈다. 촬영소스에 선녹음한 대사를 붙인 후 편집해서 기술감독에게 넘겨주는 건 내 몫이었는데 나중에는 기술감독 작업 속도가 워낙 빨라 내 마음이 급해질 정도였다.
장편이건 단편이건 기존 애니메이션 중에 이미 3D 더미를 활용한 경우가 있었어요. 하지만 원화를 그려내기 위해 작품 전 과정을 3D 더미로 애니메이션을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사랑은 단백질>이 처음이 되겠네요.
더미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① 보다 자연스럽고 정교한 캐릭터 움직임 표현 가능
② 애니메이션 원동화 작업시간 절감
③ 캐릭터 움직임에 대한 최종 아웃풋 프리뷰 용이
④ 형태 변형, 타이밍 불일치, 입 셀 불일치 등의 문제점 최소화
⑤ 실촬영 소스가 3D 더미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 삭제 및 부족한 부분 첨가 가능
⑥ 2D와 3D의 장점만을 활용 등이 그것이다.
특히 ⑤번의 경우 로토스코핑 기법과 비교했을 때 아주 편리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로토스코핑은 촬영 후 앵글의 변화나 동작의 수정 등이 쉽지 않고 수정을 하려면 불가피하게 재촬영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더미 애니메이션의 경우 3D 캐릭터의 즉각적인 수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⑥번의 경우 부연설명을 하자면 동작 관련한 부분은 3D로 표현하기가 2D보다는 편리하기 때문에 더미 애니메이션이
적합하고 표정 관련 부분은 3D보다 2D로 직접 해결하는 방법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화 담당자들은 동작이나
형태에 대해 고민을 하기보다 사실적인 표정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 보다 풍성한 연기 표현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장점 외에 촬영 후 3D 더미 제작과정을 한 번 더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단점으로 거론될 수 있지만 실제로 작업을 진행해 본
결과 그 단점은 다른 많은 장점으로 인해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
더미 애니메이션은 마치 영화 촬영 현장에서 감독이 배우에게 Action과 Cut 사인을 보내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컨트롤하거나 OK 컷과 NG 컷을 바로 판단하는 과정도 닮아있다. 실촬영 소스를 더미 애니메이션으
로 재현하고 나면 연감독은 바로 체크를 하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리테이크 지시를 내려 빠른 시간 안에 원하는 액션 연출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감독이 감독의 연출의도를 잘 파악하는 똑똑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를 만나는 게
중요하듯이 더미 애니메이션 역시 3D를 효율적으로 다루면서 감독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는 스태프가 무척 중요하다. 다행히 연찬흠 기술감독은 그런 부분에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줬고 작업방식이나 기술적 문제에 관련해서도 적극적인 조언과 의견을 아끼지 않았다.
연찬흠 기술감독
애니메이션은 시간과의 전쟁이다. 더미 애니메이션 기법은 시간에 쫓기는 감독과 애니메이터들에게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해줄 것이다. 하긴 그런 여유는 반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유가 생기면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욕망하는 유전자가 그들 몸 안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테니까.